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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후

by 도화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하늘에는 신들이 살았어요. 신들은 인간들의 운명이 꼬이거나 잘못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순찰을 나갔는데 어린 신 하나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인간을 싫어하던 신은 그 인간을 만나고 감정을 배웠고 보답으로 먹을 것을 주며 가뭄이 든 인간네 마을 사람들과 나누라고 했어요. 하지만 신은 알지 못했어요. 인간에게는 신들에게는 없는 ‘욕심’이라는 것이 가득하다는 걸 말이에요. 신의 사랑을 받던 그 인간은 먹을 것을 골고루 나눠주었지만, 인간의 것을 탐한 마을 사람들은 달밤에 인간을 꾀어서 산으로 부른 뒤 몰래 죽이고 시체를 산에 버렸어요. 이 사실은 안 신이 분노하여 마을에는 밤낮으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어요. 그 바람에 마을은 풍비박산이 났죠.

 

‘그래서? 신의 화는 끝났어요?’

 

‘아니. 인간의 운명에 간섭한 대가로 벌을 받아서 산에······.’

 

 

 

 

 

“으헉!”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침을 손으로 슥 닦아내며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기사님을 제외하고는 나 혼자 남아있었다. 꽤 이불킥 감으로 남을 뻔했어.

 

 

-지직, 이번, 정, 류장은···

 

 

버스의 움직임 때문에 계속해서 말이 끊기는 안내방송을 듣고 내릴 준비를 했다. 드디어 탈출인가. 휴대폰 신호도 잘 안 터지는 바람에 sns는커녕 출발 후에 엄마한테 연락도 못 하고 장장 2시간을 끝나지 않는 산만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지루하게 온 게 왠지 짜증이나 괜스레 창밖의 산을 흘겼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를 두고 가는 버스를 바라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정류장에서도 20분은 걸어가야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기분 나쁠 정도로 뜨거운 햇빛, BGM으로 삼기에는 조금 시끄러운 매미들의 노랫소리, 신발 바닥으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여느 때와 조금 다른, 그저 그런 여름날이었다.

 

비 갠 후 (W. 도화)

“더워······!”

 

10분쯤 걷다가 결국 근처에 보이는 구멍가게로 쏙 들어갔다. 쓸데없이 옆으로 길기만 한 산은 나를 강한 햇빛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신호는 세상과 나를 이어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계세요?”

 

가게에는 모시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목소리를 들으신 건지 돋보기 너머로 나를 흘끗 쳐다보시고는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리셨다. 나야 뭐, 그게 더 감사하지만.

 

탈탈탈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로 가서 겨우 땀을 식혔다. 평소 같으면 그냥 내방에서 에어컨 틀고 누워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당장은 이 고물 선풍기도 감지덕지다.

 

-이번 방학은 할머니 댁에서 보내기로 했어.

 

여름방학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쯤의 일이었다.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댁은 큰이모가 계속 관리하고 계셨다. 이미 아들 둘 다 장가도 보냈고 여생은 추억회상이나 하며 산다고 하셨던가. 하여튼 그런 이유로 할머니 댁에 갈 일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엄마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도 겹쳐진 상태에서 오랜만에 온 큰이모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얼굴 본 지도 오래됐는데 내 방학 동안 여기서 쉬다 가면 어떻겠냐는 큰엄마의 달콤한 제안을 엄마는 바로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내 귀한 여름방학은 어머니께 고이 반납하게 되었다.

 

“상의도 없이···.”

 

물론 나도 내 나름대로 반대의 의사를 표했다. 친구들과 약속도 있고 학원 보강은 어떻게 할 거냐며 반박했지만 통할 리가. 그렇게 안 다닌다고 떼를 쓸 때는 들어주지도 않던 학원을 그만두게 했고 친구들은 개학하고 만나라며 내 입을 싹 닫게 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걸 알기에 그냥 말을 아꼈다.

 

깡깡 얼어붙은 생수를 하나 사서 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살짝 걸터앉는다. 휴대폰 신호는 여전히 터지지 않았고 송골송골 맺히는 땀은 닦아도 닦아도 멈추질 않아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고개를 젖혀 생수병을 이마에 가져다 대자 병에 맺힌 물방울이 땀과 섞여 얼굴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대로 더워서 죽으면 어떡하지. 목구멍까지 꽉 막히는 더위에 이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마에 대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눈을 뜨기에는 햇빛이 너무 강했다.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해서 시야를 가려본다. 손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은 못 막나 보네.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벌리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밝은 빛이 내리쬔다. 손을 내리자 더 많은 빛이 눈으로 들어왔다. 강렬한 햇빛에 찡그리고 있던 눈도 점차 적응해가며 크게 떠 보인다. 열기 때문일까. 정신이 어질해진다. 태양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내가 태양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괜찮을 것 같은 건 어째서일까.

 

“보지 마.”

 

갑자기 길고 하얀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이내 주변이 어둠으로 물든다. 서늘하다기엔 그다지 무섭지 않고, 차갑다기엔 약간의 온기가 감도는,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런 온도였다. 정체 모를 손의 등장 때문인지 일순간 답답하던 주변의 공기가 풀어졌다. 더위가 가신 건 아니었지만 호흡도 아까보다 편해졌다.

 

“······저기요.”

 

“그렇게 맨눈으로 보면 큰일 나. 위험하니까 하지 마.”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밝아진다. 머리를 그대로 젖히자 손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후드티에 모자까지 뒤집어쓴 이상한 사람. 옷과 대비되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내 모습을 가득 담은 산처럼 깊고 진한 초록빛 눈동자. 여기 사람이려나. 처음 보는데 꽤 익숙한 느낌이 든다. 더위 먹은 건가. 평소 같으면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텐데 말문이 먼저 트인다.

 

“누구세요?”

 

“······.”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산을 향해 걸어갔다. 산책로도 없는 길인데 저기로 어떻게 가는 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휙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눈을 꼭 감고 한참을 있었다. 바람이 멎고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발이 아주 빠른, 미묘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이상한 사람이네.”

 

“아이고! 우리 하리 왔냐!”

 

“잘 지내셨어요?”

 

꽃이 잔뜩 그려진 몸뻬 바지를 입은 큰 이모가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 나와 나를 반겨주셨다. 오느라 힘들진 않았냐,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다 등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랴, 짐 옮기랴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요?”

 

“이제 찾니?”

 

“딸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나 참, 왜 보자마자 승질이야.”

 

누가 봐도 편한 자세로 누워 수박을 아삭아삭 먹는 엄마가 좀 미웠다. 나는 이 뙤약볕에 고생을 했는데 자기는 먼저 차 타고 내려가고 말이야.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리는 이 방에서 지내. 엄마가 그저께 와서 짐은 다 가져다 놨어.”

 

“네, 그럴게요.”

 

“애기 때는 할머니 팔베개하고 이 방에서 같이 자고 그랬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대.”

 

중얼거리며 나가시는 큰이모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몇 살인지 기억도 안 나던 시절에는 방학 때 이렇게 종종 할머니 댁에 내려와서 여름을 나곤 했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는 날에는 문을 모두 열고 따끈한 감자를 호호 불어먹으며 빗소리에 귀 기울였고, 햇빛이 쨍한 날에는 산 밑의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식혔다. 열대야가 있는 날에는 다 낡아서 탈탈거리는 선풍기와 엄마의 손바람에 의존해 잠을 청하기도 했다.

 

“···아.”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에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길고 커다란 산이 품고 있는 신비롭고도 안타까운..

 

“구하리! 이사하냐?”

 

“아, 엄마 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한 달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여기서 쓸 짐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도대체가 감상에 젖을 시간을 안 줘요.

 

 

 

 

“나가서 좀 돌아다녀.”

 

“아, 왜 또.”

 

“종일 집에만 처박혀 있을래? 방학 내내?”

 

“엄마가 끌고 왔잖아.”

 

애초에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날 대체 왜 데리고 온 거지? 차마 엄마에게 하지 못할 짜증을 삼킨 채 삼선 슬리퍼를 끄시고 밖으로 나섰다. 이 더위에 어딜 가라는 거야. 더워서 쓰러지게 생겼는데 진짜.

 

“이런 게 있었나.”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이끼가 잔뜩 낀 산책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표지판의 글씨들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되었다는 걸 대신 설명해 준다. 이끼도 문제지만 형체도 알 수 없게 수풀들에 먹혀버린 산책로도 문제였다. 사람은 고사하고 작은 동물들도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엉망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어릴 때 이후로 안 왔다지만 그때도 이런 건 없었던 거 같은데. 내가 없는 동안 생겼을지 몰라도 이렇게 관리를 안 하면 왔던 사람도 돌아가겠다. 귀신들이나 나오게 생긴 공포 스폿 같은 비주얼에 괜스레 오한이 들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다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익숙한 공기. 아, 며칠 전에 그 구멍가게에서 불었던 바람과 같은 느낌이었다. 익숙한 시원함, 탁 트이는 호흡.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쳐도 될 텐데. 몸은 이미 표지판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좁고 작은 길. 풀숲에 가려져 있었던 건가. 사람이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좁은 산책로. 어쩐지 가셔버린 더위와 나를 부르는 듯한 이 이상한 숲. 결국, 난 호기심에 못 이겨 산책로로 발을 디뎠다.

 

나무들의 키가 점점 높아져 햇빛이 잘 보이지도 않을 때쯤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지. 뭐에 홀린 것처럼 무작정 걸었다. 슬슬 돌아가야 하는데 도무지 돌아갈 마음이 들질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숲에 매료된 걸까. 이제 와서 이유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어?”

 

저게 뭐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기둥. 드문드문 기와가 빠져있는 오래된 사당이었다. 어렸을 땐 높이까지 안 올라와서 몰랐는데 저런 것도 있네. 물론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반쯤 허물어진 담장과 세월의 풍파를 맞아 흔적만 남아있는 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안내 표지판. 문화재 아닌가. 이렇게 오래됐는데 관리도 안 하는 거면 아닐 수도.

 

기왕 올라온 거 살짝 구경이나 할 겸 사당으로 향한다. 사당은 오래됐는데 사당 주변의 풀들은 점점 높이가 낮아졌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는 풀이 발목만큼 자라 있었는데 이곳만은 어째서인지 잘 정돈된 모습이다. 누가 일부러 가꿔놓은 것처럼.

 

사당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분명 처음 보는 사당인데 어딘지 익숙한 느낌도 든다. 모습이 신기해서인가. 낡아서 달랑거리는 경첩에 겨우 매달린 문을 살포시 밀어내고 문지방을 넘어 사당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본다.

 

“······.”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걸까. 마당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꽃들. 바깥에서 본 모습과 달리 잘 정돈된 담장과 건물. 마치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같이 생생한 풍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 온 거지.”

 

문밖에서 들려오는 차분하고 낮은 음성. 할머니 댁에 오던 길에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검은 후드티에 짙은 녹색 눈을 가진 이상한 사람. 언제 온 거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여기, 당신이 만든 거예요?”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길이 있길래 올라왔죠.”

 

“돌아가. 평범한 인간이 있을 곳이 아니야.”

 

“그럼 뭐, 그쪽은 평범한 인간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내 질문에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눈을 조용히 응시하고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왔다.

 

그 사람이 문을 넘고 발을 딛자 아까 숲을 오를 때와 같은 부드러운 바람이 사당을 감쌌다. 발을 딛는 곳 주변에는 들꽃들이 환하게 피어났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이 담장에 앉아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다시 그를 올려다봤을 때 이미 내가 알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옥색 한복과 손에 쥔 하얀 부채. 그리고 주변을 채우는 숨을 탁 트이는 공기까지.

 

“이래도 내가 평범한 인간으로 보여?”

 

내가 아는 인간의 범주에,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50cm도 안 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닌 자. 괴물? 아까 꽃들이 막 피어나던데 그러면 죽일 수도 있다는 건가. 나 오늘 여기서 죽나.

 

“···겁먹을 거 없어.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내 떨림을 느낀 건지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당으로 향했다. 거짓말 같진 않았다. 하지만 몸의 떨림은 가시질 않았다. 꿈인가. 꿈이겠지. 엄마 잔소리부터 꿈이었던 거야. 눈을 감았다가 뜨면 분명 깨어날 거야. 하나, 둘, ···

 

“계속 서 있을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뒤를 돌자 막자로 뭔갈 찧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의 충격이 가신 건 아니지만 저렇게 얌전히 앉아 조그마한 막자로 풀을 콩콩 찧는 건 제법 우스운 모습이었다. 미니어처를 들고 있는 듯한 모습에 아까 겁에 질렸던 건 잊고 어느새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웃겨?”

 

헙. 들켰나. 잽싸게 입을 가렸지만 아무래도 본 모양이다. 다시 막자사발로 고개를 돌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 지금 목숨이 꽤 위험한 상황 아니었던가.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나.

 

“이리 와서 앉아.”

 

“역시 잡아먹으려고···!”

 

“···그래 줬으면 좋겠어?”

 

아뇨. 괜히 까불댔다가 진짜 죽을지도 몰라서 일단 얌전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기분 좋은 콩콩 소리와 조금은 잦아든 햇빛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개를 슬쩍 돌려서 옆을 바라보자 찧기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엄청 잘생겼는데 왜 얼굴 가리고 다니지.

 

“뚫어지겠다.”

 

“뭐, 뭐가요!”

 

허. 기가 찬 듯이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던 무명천을 집어 가위로 길게 잘랐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자기 옆쪽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왜요?”

 

“더 가까이 와서 앉아.”

 

“왜요!”

 

“······.”

 

한숨을 푹 내쉰 그는 내 앞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아당겼다. 뭐 하는 상황이지. 한쪽 무릎을 왜 꿇는 거지. 내 손을 왜 잡지. 설마? 아냐. 이건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거야. 하지만 왜? 이제 두 번째 본 거 아닌가?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거야? 진짜로? 안 돼. 난 아직 미성년자고 아무리 잘생겼어도 이제 2번 만난 사람과 결혼하고 싶진 않아!

 

“죄송해요! 전 아직 결혼 생각은··· 아야!”

 

갑자기 손바닥으로 느껴져 오는 쓰라림에 꼭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아까 찧은 풀을 내 손에 올리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이제야 내가 제대로 착각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밀려오는 쪽팔림과 붉어지는 얼굴은 덤이었다.

 

“결혼이라도 하자고 할 줄 알았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얼굴이 붉어?”

 

“무슨 상관이에요.”

 

다 됐다. 왼손에 곱게 묶인 무명천은 길이도 알맞고 피부가 쓸려 아프지도 않았다. 그는 공이와 남은 천을 다시 사당에 넣어놓고 나와 내 옆에 앉았다.

 

“1각은 있다가 풀러.”

 

“1각이 뭔데요?”

 

“15분 있다가 푸르고 가라고.”

 

그러면 15분 동안 뭐하지. 주변을 둘러보며 놀 거리를 찾았다. 15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이 적막을 유지하는 것도 꽤 못 할 짓이었으니까.

 

“인간이 아니면 뭐예요? 구미호?”

 

“신선, 신령, 산신. 뭐, 이런 이름들로 불려.”

 

“뭐 먹고 살아요?”

 

“안 먹고도 살아.”

 

“여기 혼자 살아요?”

 

“어.”

 

“이름은요? 전 구하리예요.”

 

“최강림.”

 

이름 특이하네.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가 계속되었다. 아무리 긴 질문을 해도 단답형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애초에 날 먹을 생각도 없었고 살생은 신에게 금기시되는 요소라고 했다.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저 꽃은 이름이 뭐예요? 엄청 많다.”

 

“돌양지꽃.”

 

“꽃말이 뭐예요?”

 

“사랑스러움, 그리움···, ···행복의 열쇠.”

 

“꽃말 예쁘다. 행복의 열쇠가 되어 줬어요?”

 

내 질문에 그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전과 달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깊은 녹색 눈동자에서 짙은 슬픔이 묻어나자 괜히 내가 말실수라도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마지막 대답에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분위기도 좀 요상해졌고 이만 내려가야겠다. 괜히 미안하네.

 

“저기···.”

 

“붕대는 산을 나서면 없어질 테니 그냥 문으로 나가면 돼.”

 

“아···, 네. 감사합니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이러다 쫄딱 젖겠네. 그런데 신은 비 맞아도 괜찮나.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저러다가 비 다 맞으면 어떡하려고 저래. 물론 내 질문에 저렇게 의기소침 모드가 되긴 했지만. 반쯤은 내 탓이려나.

 

“비 맞으면 안 되니까! 꼭 안에 들어가 계세요!”

 

목소리를 들은 그는 시선을 내게로 향하더니 뭔가를 중얼거렸다. 잘 안 들리는데. 그래도 내 말은 들은 듯하니 급한 불은 껐다. 이제 정말 하늘이 새카매져서 비가 쏟아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달려가야 겨우 도착할 거리, 뭔가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사당 문을 뛰어나갔다.

 

“어···?”

 

발을 내디딘 곳은 푹신한 잡초 위가 아니라 처음에 들어온 산책로 표지판 앞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낡은 사당 문대신 거대한 산이 있었다. 이어져 있는 건가. 아니면 공간이동의 문 이런 건가? 문을 나서면서 왼손에 묶여있던 무명천은 상처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동화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앗, 차가!”

 

이마에 톡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물론 아까까지 있었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건 아니지만. 비현실적인 현실이라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생각하자. 소나기는 내일이면 그칠 테니까.

 

 

 

-감히 어딜.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면 말해.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구하리!

 

“또 꿈···인가.”

 

비는 이 주 가까이 내리고 있었다. 계속 내리는 건 아니었지만 내리지 않는 날도 맑은 건 아니었기에 기분이 그리 상쾌하진 않았다.

 

그날, 사당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같은 꿈을 꾸었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사당에서 제법 재미있어서 꿈에도 나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꿈을 꿨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생생해져 갔다.

 

꿈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림을 올려다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검은 계열의 한복을 펄럭이며 내려오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나무들 사이로 떨어진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상태를 물으려 하지만 그는 굉장히 경계심과 혐오감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디 손을 대는 것이냐.

 

나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풀밭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짚으로 엮은 가방에서 꽃과 풀들을 꺼내 옆에 있는 넓적한 돌에 놓고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손에 풀들을 올리고 내 옷 소매를 찢어 꽉 묶는다. 그는 그런 나를 놀란 얼굴로 빤히 보고 있다.

 

-귀신인지 신령님인지는 모르겠지만 1각은 묶어놓고 계셔야 상처에 스며들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본 건 일부러가 아니고 지나가던 길이었으니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나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장소가 바뀐다. 저번에 갔던 사당 마루에 둘은 나란히 붙어 앉아있다. 그는 시답잖은 얘기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나를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다. 좀 전에 본 장면에서의 차갑고 매정한 표정이 아닌 연인을 보는 듯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야. 곧 일어나실 수 있을 것 같아!

 

-잘됐네.

 

-이제 더 자주 보러올 수 있어.

 

밝게 웃어 보이는 내게 그가 천천히 입을 맞춰오면 다시 흐릿해지며 장소가 바뀐다. 어두운 마을 분위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집. 아마도 내가 사는 곳 같았다. 사람들은 내게 화를 내고 밀쳐서 넘어트리고는 돌아간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나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무언가로 푹 찔러 기절시켰다.

 

이후의 장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장소가 산으로 바뀐 것만 인지된다. 비가 내린 듯 축축한 풀들 위에서 강림은 나를 끌어안고 서글프게 운다.

 

-안 돼 하리야. 안 돼, 제발. 안 돼. 내가 살릴 수 있어. 내가 치료할 테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미안해··· 강림아. 다시··· 다시 만날 거야, 분명.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내가 널 꼭 찾을게. 다시 만나러 갈게.

 

나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리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꿈에서 깨면 꿈속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모두 몰려온다. 마치 내가 실제로 겪은 것처럼. 처음 만나 놀람, 사당에서 느낀 사랑, 마을 사람들에게서 느낀 충격,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고 싶다는 슬픔까지. 꿈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인데도 그 감정은 가시질 않았다.

 

“하리야, 나와서 김치전 먹어라.”

 

“네에··.”

 

“얘가 요즘 기운이 없네. 날이 좀 우중충하긴 하지?”

 

“아하하, 괜찮아요.”

 

젓가락을 들어 김이 폴폴 나는 김치전 한 조각을 집어 든다. 입맛도 떨어져서 뭐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왜 계속 이 꿈만 꾸는 거야. 기분 나빠.

 

-연일 계속되는 폭우에 전문가들은···

 

“어휴, 언제까지 오려나. 모처럼 내려왔는데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언니, 이거 그걸지도 몰라. 왜, 엄마가 우리 어릴 때 산신 울면 비 내린다고 했잖아.”

 

맞네, 맞아! 엄마와 이모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추억을 회상하며 수다꽃을 피웠다. 이 동네 비가 오는 건 산신이 어쩌고···, 잠깐. 산신?

 

“이, 이모. 산신이 뭐라고요?”

 

“너도 듣지 않았어? 그 왜 할머니가 옛날에 맨날 해주던 이야기 있잖아. 인간과 사랑에 빠진 산신이 그 인간의 죽음 때문에 이 일대가 홍수에 난리도 아니었다는 얘기.”

 

아. 바보같이. 이걸 왜 이제야 떠올린 걸까. 그저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 신발이나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와 이모의 외침이 들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할머니이···, 천둥 무서워요···.’

 

‘우리 하리, 할미 무릎에 얼른 누워.’

 

수도 없이 들어놓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늘에서 인간 세상에 정찰을 내려온 신은 인간에게 그 정체를 들켰고 냉정한 자신을 쳐내지 않고 곁에 있어 준 인간에게 반했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고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인간의 마을에 가뭄이 들어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신은 인간에게 곡식을 주며 사람들과 나누라 했고 인간은 기쁜 마음으로 이를 실천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되려 인간의 곡식을 노려 인간을 죽이고 곡식을 빼앗았다. 산에 버려진 인간을 본 신의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비바람이 쳤고 이후 비가 오는 여름날이면 산신이 제 연인을 그리며 슬퍼하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할머니, 그러면 신은 하늘에 안 올라가고 계속 인간 세상에 있는 거예요?’

 

‘신도 거슬러서는 안 되는 섭리를 자기 멋대로 건드린 탓에 저 높으신 분께 벌을 받았지. 1000년 동안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이 산의 산(山)신으로 강등되는 벌이었단다.’

 

천 년. 자그마치 천 년을 기다렸다. 수명이 100년 안팎인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2주 동안 내가 꾼 꿈의 주인은 아마 이야기 속의 인간, 정확히 말하자면 1000년 전의 내 전생일 것이다.

 

빗물이 시야를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빗물인가.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축축하게 젖은 소매로 애써 눈가를 닦으며 달려간다. 모든 퍼즐이 맞춰져 갔다. 손의 상처를 치료하는 걸 그에게 알려준 것은 나였다. 처음 만난 날,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 내 눈을 가린 건 과거의 내가 같은 행동을 한 적이 있어서였다. 아마 내가 기억을 해낼까 싶어 그날 나를 찾아왔었던 걸 테고. 옷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계열의 한복에서 전생의 내가 좋아했던 밝은 빛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산책로의 표지판이 보인다. 거센 비바람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번처럼 걸어서 올라가기에는 사당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무엇보다 당장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기억났어···. 다 기억났다고···. 이제 그만 울어, 강림아. 내가, 내가 다 기억했어. 다 기억해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야 하는데, 다 기억났다고 네게 말해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어서 가서 너를 만나야 하는데.

 

머리 위로 세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잦아든다. 고개를 들자 그 옛날의 다정한 미소로 네가 날 보며 웃는다.

 

“기다리고 있었어, 하리야.”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햇살이 우리를 밝게 비춘다. 오랜 시간이 걸린 운명적인 만남을 축하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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